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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후 다시보는 네이버의 한글날 프로젝트 <아름다운 한글 간판>

나 그리고 나의/생각_thinktank

by 카펠 2026. 9. 1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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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맞아 네이버에서 꽤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름하여 ‘아름다운 한글 간판’.
길을 걷다 보면 무슨 가게인지 한 번에 알아보기 어려운 영문 간판이 참 많습니다. 영어로 적으면 어쩐지 세련돼 보이고, 한글로 적으면 조금 촌스러워 보인다는 이상한 편견도 있고요. 계피는 촌스럽고 시나몬은 우아한 것과 비슷한 이치인가 봅니다. 그런데 간판 몇 개를 보고 나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게의 이름을 한글로 다시 쓰다

네이버의 ‘한글한글 아름답게’ 캠페인은 일상 속에서 한글의 가치를 나누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2013년에는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20개 상점을 선정해 새 한글 간판을 달아주었습니다. 단순히 영문을 한글로 옮겨 적는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가게 주인의 사연을 듣고, 무엇을 파는 곳인지 살피고, 건물과 골목의 분위기까지 생각해 가게마다 전혀 다른 간판을 만들었습니다. 이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가게가 살아온 이야기를 거리 쪽으로 꺼내 놓은 셈입니다.

씽씽자전거

씽씽자전거 간판 교체 전 모습
영문 간판만으로는 자전거 가게라는 점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전 모습.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씽씽자전거 한글 간판 교체 후 모습
자전거 바퀴와 체인 이미지를 넣은 ‘씽씽자전거’. 이름도 업종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서울 구로구의 ‘씽씽자전거’는 자활센터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만든 자활기업이라고 합니다. 이전 간판에는 영어로 SINGSSING BIKE라고 적혀 있었는데, 새 간판은 큼직한 한글 이름과 자전거 그림을 함께 넣었습니다. 초록색도 자전거 가게의 활기와 잘 어울립니다. 영어를 없앴다는 것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 가게인지 바로 알 수 있게 된 점이 더 좋았습니다.

꿈 튀기는 공작소

꿈 튀기는 공작소 간판 교체 전 모습
간판 교체 전의 작은 튀김가게.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꿈 튀기는 공작소 한글 간판 교체 후 모습
튀김도 튀기고 꿈도 튀기는 곳. 말장난 하나가 가게의 표정이 됐습니다.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성북구의 작은 튀김가게에는 ‘꿈 튀기는 공작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튀김이 톡톡 튀는 느낌을 사선 무늬로 표현하고, 벽돌 건물에 잘 어울리는 차분한 색을 골랐다고 합니다. 화려하게 번쩍이지 않는데도 한 번 보면 이름이 기억납니다. 간판이 광고판이면서 동시에 짧은 문장이 될 수도 있다는 좋은 예입니다.

한아름문구완구

한아름문구완구 간판 교체 전 모습
태풍에 간판 일부가 떨어져 ‘한아…완구’만 남았던 문구점.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한아름문구완구 한글 간판 교체 후 모습
아이들이 좋아할 블록 모양으로 새로 만든 ‘한아름 문구 완구’.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인천의 ‘한아름문구완구’는 초등학교 옆을 29년 동안 지켜온 가게였습니다. 태풍 때문에 간판 가운데가 떨어져 나갔지만 바쁜 살림에 바로 고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새 간판은 문구점답게 알록달록한 블록 모양으로 만들고 안쪽에 조명을 넣었습니다. 새것이 됐는데도 프랜차이즈처럼 똑같아지지 않고, 동네 문구점다운 얼굴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달에 물들다

달에 물들다 게스트하우스 간판 설치 전 모습
간판을 달기 전, 제주 돌담 안쪽의 게스트하우스 입구.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달에 물들다 한글 간판 설치 후 모습
달 모양과 손글씨가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달에 물들다’. (사진: 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제주 월정리의 게스트하우스 ‘달에 물들다’는 이름부터 예쁩니다. 바람이 센 제주라 옥상 간판 대신 입구에 달 모양을 달고, 돌담과 나무에 어울리는 부식 철판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간판이 건물 위에서 소리치지 않고 풍경 안으로 조용히 들어간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네 곳 가운데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글이라서 예쁜 것이 아니라, 잘 만든 한글이라서

이 프로젝트를 보고 느낀 점은 ‘외국어 간판은 나쁘고 한글 간판은 좋다’가 아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유행하는 글꼴을 얹은 한글 간판도 충분히 재미없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게의 성격과 주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읽고 만든 간판은 한글의 모양과 리듬을 훨씬 매력적으로 보여줍니다.
‘씽씽’, ‘튀기는’, ‘한아름’, ‘달에 물들다’. 뜻을 읽는 순간 이미지가 떠오르는 말들입니다. 알파벳 로고를 흉내 내지 않아도 한글만으로 얼마든지 재미있고 현대적인 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간판은 건물에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거리의 표정을 만듭니다. 가게 하나의 얼굴을 바꾸는 일이 골목 전체를 조금 따뜻하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프로젝트라면 한글날 하루의 이벤트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임. 이 캠페인은 이듬해 더 확대되어 전국 16개 가게와 청계천 헌책방 거리 25개 서점에도 한글 간판을 달았습니다. 제목만 보고 ‘그냥 간판 바꿔주는 행사겠지’ 했는데, 들여다볼수록 가게 사연을 디자인으로 번역한 프로젝트에 가까웠습니다.



12년 후 다시 보니



2026년, 12년 뒤에 다시 이 글을 마무리하며
이 글을 처음 쓰려고 저장해둔 것이 2014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2026년.
무려 12년이 지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포스팅 하나 쓰는데 12년이 걸리는 사람이 어디있냐.그게 나다.

사진도 있었고, 자료도 다 모아놨고, 쓰고 싶은 내용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냥 계속 미뤘다.
그러다 2026년이 되어서야 사진을 다시 보고, 옛날에 저장해둔 자료를 다시 열어보고, 결국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묘한 기분이다.

당시에는 그냥 "한글 간판 예쁘네."
정도의 관심으로 자료를 모았던 것 같은데, 12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오히려 지금 더 좋아 보이는 디자인들이 많다.
특히 '달에 물들다' 같은 간판은 2026년에 가져다 놓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요즘 흔히 보는
영문 상호 + 비슷비슷한 고딕체 + 미니멀한 조명 조합의 가게들 사이에 놓으면 훨씬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네이버는 왜 이 좋은 걸 더 안 했지? 찾아봤다.

정확히 말하면 네이버의 '한글한글 아름답게' 캠페인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2008년에 시작한 이 캠페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내가 이 글에서 소개한 가게의 사연을 받아 직접 한글 간판을 만들어주는 사업은 사실상 2013년과 2014년에 집중되어 있었다.
2013년에는 전국 20개 상점에 간판을 달았고, 그 반응이 좋았는지 2014년에는 규모를 더 키워 전국 16개 가게와 청계천 헌책방 거리 25개 서점의 간판까지 바꿨다.

그런데 네이버 공식 캠페인 연혁을 계속 내려가 봐도 2015년 이후에는 한글 간판 프로젝트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방향이 달라진다.
글꼴을 만들고, 타이포그래피 행사를 후원하고, 한글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마루부리 같은 새로운 한글 글꼴을 사용자와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네이버가 이 캠페인을 설명할 때 아예
'디지털 한글 생태계'
라는 말을 쓴다.

2025년 한글날 캠페인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갔다.
우리말 가운데 외국어로 쉽게 번역하기 힘든 단어와 그 안에 담긴 문화적 맥락을 모으고,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를 HyperCLOVA X와 파파고가 우리 문화와 맥락을 이해하는 데 활용하도록 했다.

2025년 네이버 한글 캠페인 담당자의 인터뷰를 읽어봐도 지금 네이버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꽤 분명하다.
종이나 거리보다 온라인에서 만들어지는 한글 정보, 글꼴, 기록, 데이터, 그리고 AI가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의 맥락.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네이버가 한글에 관심을 잃어서 간판 프로젝트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네이버라는 회사가 하는 일이 변하면서 한글 캠페인이 향하는 장소도 거리에서 디지털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네이버가 공식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간판 프로젝트를 종료했습니다" 라고 발표한 자료는 찾지 못했으므로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지난 12년의 캠페인 연혁을 보고 내린 나의 해석이다.
하지만 흐름은 꽤 명확해 보인다.

국립한글박물관
그리고 그 방향도 이해는 된다.
한 가게의 간판 하나를 바꾸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고, 현장을 보고, 디자인하고, 제작하고, 설치해야 한다.
반면 좋은 한글 글꼴 하나를 만들어 무료로 풀면 수백만 명이 쓸 수 있다.
한국어 데이터를 잘 쌓으면 검색과 번역과 AI에 계속 남는다.
인터넷 회사인 네이버라면 어느 쪽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될지는 이해된다.

그런데. 그래도 조금 아쉽다.
12년이 지난 지금 사진을 다시 보면서 오히려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디지털 프로젝트는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지만 컴퓨터를 끄면 보이지 않는다.
간판은 다르다.
그 골목을 걷는 사람이라면 그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든 없든 매일 보게 된다.
그리고 잘 만들어진 간판 하나가 낡은 가게 하나를 바꾸고, 그 가게가 골목의 분위기를 바꾼다.
나는 이 점이 좋았던 것 같다.
한글을 알리겠다고 거창하게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자전거 가게, 튀김집, 문구점, 게스트하우스의 얼굴을 조금 더 예쁘게 만들어주는 것.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글도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
생각해보면 굉장히 세련된 캠페인이었다.

12년 전에 이 프로젝트를 보고 글을 하나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나도 아마 그 부분이 좋았던 것이겠지.
그리고 12년 뒤의 나는 그때보다 집도, 가구도, 물건도 훨씬 많이 보고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결국 물건의 모양만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물건이 놓여 있는 사람과 공간의 이야기를 읽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니 이 한글 간판 프로젝트가 더 좋다.
간판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그 가게를 디자인했던 것이다.
2014년에 쓰려고 했던 글을 2026년에 끝냈다. 참 오래도 걸렸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남겼으니 됐다.
그리고 언젠가 네이버가 AI와 디지털 한글을 열심히 하다가 문득 다시 거리로 나와서
'한글 간판 시즌 2'
같은 걸 해줬으면 좋겠다.

그때는 이 글을 12년씩 묵혀두지 않고
바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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